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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 '구라파적인 것'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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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적인 것'의 종말 김기석   "세계를 신과 인간과 자연 으로 생각한다고 하면 그리스정신의 입장은 인간중심주의, 기독교의 입장은 신중심주의, 구라파정신의 입장은 자연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리하여 서양정신사는 그리스정신 기독교 및 구라파정신에 있어서 각각 인간, 신, 자연을 중심으로 하고 전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에 있어서뿐 인간을 본 것이 아니고 신이나 자연에 있어서도 인간적인 것을 읽으려고 했 다. 그리고 그들의 인간은 극히 즐겁고 유쾌한 인간으로서 인간 자신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결한, 따라서 아직 신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의 Humanism은 현세주의 자유주의 이성주의 문화주의 내지 낙천주의에 마쳤다. 기독교는 이와 반대로 인간 자신의 침통한 현실에 대한 고뇌와 자각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넘어서는 절대자에 돌아가기를 권하고 인간이 자연과 함께 신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면서 도리어 신의 성의를 거슬려 그 때문에 죄와 악에 떨어졌다고 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최대 구경의 사명이 이 신을 사랑하고 신을 두려워하고 신에게 돌아가는 데 있어 신의 성의를 받드는,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계명의 근본정신이라고 가르친다. 구라파 정신의 개전은 서양 중세를 통하여 오랜동안 누려 온 인간과 자연을 탈환 회복하는 운동이었다. 근세 구라파사람들은 말하자면 신에 눌리이고 신에 지쳐 그 고달픈 가슴을 안고 자연에로 자연에로 달렸다. 문예부흥기는 그들이 오랜동안 떠나 있던 자연에 돌아와 씩씩하고 반가운 자연의 품에 안기면서 몸과 마음이 통째로 이 즐거운 자연에 취하는 시가였다. 그들은 인간마저 한개 자연으로 보았고 신조차 이것을 자연 속에서 읽으려고 했다. 그들의 인문주의는 오래지 않아 인간기계론에 나아갔고 그들의 범신론은 마침내 무신론과 바뀌었다. 공리주의 실증주의, 행복설, 자연주의, 귀납법, 유물론, 자연과학의 발흥, 산업혁명, 기계주의 문명, 유물사관,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발달, 근대도시의

김범부 - 우리의 국가관과 화랑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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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국가관과 화랑정신 김범부 "나 자신이 일찍이 여러 나라 국민의 국가관을 비교 연구해 본 일은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의 국가관에 관한 한 별도의 연구까지는 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윤관만은 대강 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가장 직접적으로 나 자신이 견지하는 국가관이 있고 우리 동포들이 국가에 대해 가지는 생각, 심정, 행동, 생활현실 등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한국 사람의 고유한 국가관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국가관이나 수입된 국가학에서 논의되는 이론 따위를 운위하는 일은 여기서는 삼가자는 취지에서 하는 말이다. 한국인이 역사적으로 고유하게 지녀온 국가관을 확인하고 적어도 그 장점만은 지켜나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 그러면 한국인의 고유한 국가관의 특징은 무엇인가? 최근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대강 짚어보면 마음에 와 닿는 무엇이 있다. 이를테면 5 ·16 군사혁명은 혁명동지들의 죽음을 각오한 국가관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4 ·19학생의거 역시 청년동지들의 목숨을 내건 국가관이 드러난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6 ·25때 적진으로 몸을 던져 싸우다가 지금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국가관은 무엇이었는가. 특히 개성전투에서 산화한 10용사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움직이고 있었을까. 일제 40년 동안 국내외에서 생사를 초월하여 투쟁한 항일의사들의 국가관은 무엇이었을까. 이처럼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몸을 던져 싸운 이들이 마음 속으로 간절히 원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 역사에서 이런 사례를 들자면 한이 없다. 아마 책 한권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질고 의로운 사람들의 심정과 행동과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 하나의 유형이 떠오른다. 그들이 지녔던 국가관의 한복판을 유유히 흐르는 하나의 공통된

민족 아나키스트의 맑스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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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national-anarchist.net/2014/01/a-critique-of-marxism.html?m=1 번역 : 버줌 편집 : 김갑식 맑스주의는 인간과 사회적 삶의 전체를 과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믿는 도그마(dogma)이다. 맑스주의는 모든 원인(cause)이 하나의 작용(operation)이 되고 모든 작용이 하나의 원인이 되는 절대적이고 기계적인 인과관계(absolute mechanical causality)를 상정한다. 밁스주의는 미래를 아는 척하고, 인간 발전의 조건을 제공하고자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맑스주의는 그저 과학의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그 누구도 과학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은 어느정도 주관적인 것이고, 단지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추정일 수 있다. 아마도 맑스주의의 가장 터무니없는 가정은 자본주의적 사실(capitalist facts)이 사회주의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가정일 것이다. 자본주의와 그것에 수반하는 불행이 그저 사회주의를 향한 여러 단계일 뿐이라는 생각은, 과학적 망상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비롯될 수 없고, 다만 부정의의 감정(a sense of injustice)과 단결의 욕망(a desire for togetherness)으로부터 자본주의에 대항함으로써만 성장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주의가 노동자 유물론의 산물이라는 맑스의 주장과 반대로, 인류는 매우 다른 이유로 사회주의로 다가선다. 사회주의는 수많은 작은 변화의 결실일 뿐이다. 어느정도 자본주의가 "성숙"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민중 역시 심각하게 퇴화되어 사회주의의 달성은 말 그대로 불가능해질것이다. 맑스주의는 불변하는 역사 발전을 근거로 미래를 확실히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의 의지와 행동이 이러한 미래를 막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맑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역사발전의 연쇄에 필수적인 연결고리로 간주한다. 그들은 자신을 사회 발전의

미국 민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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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민족의 역사 샤를 모라스   우연히 미국에서 역사 교사로 근무하는 한인 교포와 대화의 시간을 가진 적 있다. 그는 요즘 발간되는 미국 역사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있다고 말하면서, 미국인들이 동아시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고무되어 있었다. 덧붙이기를, <비 단 한국의 역사만이 아닌,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 이기도 하기에 미국인들에게 교육해야 한다 >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미국인의 시조는 누구인가? 콜롬버스? 메리플라워 호의 청교도들? 조지 워싱턴을 위시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의 국체를 건설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현대 미국인의 공통된 시조가 될 수 없다. 1790년 미국 최초의 이민법에 의거하자면, 오직 백인만이 미국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국은 그 시작조차 불분명한 빈약한 역사의 나라다. 이는 미국의 건국 자체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인위적인 실험의 결과이기 때문이며, 조상이라는 존재를 모르고 태어난 최초의 수정관 아기이다. 이 아이에게 아버지를 만들어주려는 시도들은 지금껏 여러 번 있어왔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미국인들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단일성을 거부함으로서 난제를 명쾌히 풀어냈다.   그렇다. 미국이라는 이 수정관 아기는 한 명의 정자로 창조된 게 아니다. 집단난교와 이종교배와도 같은, 아메리카 대륙을 더럽힌 수천 수백 가지 인종적 혼합의 결과물인 미국은 그들 모두의 시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요컨대 샤를마뉴와 아서왕, 카이사르와 공자, 단군의 자손들이 미국 시민권을 발부받는 즉시 그들 모두의 아버지를 자신의 것으로 물화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순수한 형태를 유지하던 신화적인 투쟁의 의식은, 미국인들에게 전승되는 과정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변증>을 거쳐 해체되고, 이윽고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만든 새로운 종족, <미국 민족>의 하부 역사

조선반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메시아니즘 - <이단 심판>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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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반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메시아니즘 - <이단 심판>의 정치학 샤를 모라스 《 김일성 주석은 미국의 건국과 운명을 대표했던 죠지 워싱톤, 토마스 제퍼슨, 아브라함 링컨 3대대통령을 다 합친것보다 더 위대하다. 김일성 주석은 세계의 건국자들과 태양신을 다 합친것보다 더 위대한 인간운명의 태양신이라는것을 나는 서슴없이 말하게 되는바이다. 》 (중략) 《예. 어버이수령님을 가리켜 현시대의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도 공감되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우리 수령님을 하늘이 낸 위인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세계의 지성인들이 수령님께서 창시하신 주체사상을 현시대의 성서라고들 말하고있습니다. 사실 주체사상을 성서에 대비하는것은 리치에 맞지 않지만 성서를 숭상하는 종교인들속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것은 주체사상이 만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있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미국의 3대 대통령이 아니라 희랍신화에서 나오는 아폴로나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모든 신들을 합친것보다 더 위대한분입니다. 그것은 <이민위천>의 세상을 현실로 안아오셨기때문입니다.》   김정일 동지께서는 흥분하실 때마다 그러하듯이 빠른 어조로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오늘 우리 민족은 수령님덕분에 가장 위대한 주체사상을 가지고 살고있습니다. 주체사상은 만민에게 주인된 운명을 주고 힘과 지혜를 주는 위대한 <복음>입니다. 주체사상은 만민공동의 소유물입니다. 이것을 가지면 세계의 주인이 되고 못가지면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메카를 찾던 사람들도 우리 나라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며 주체의 <복음>을 찾고있으며 6대주에는 <성바울>들이 별무리를 이루고있는것입니다.》 …   북조선 당국이 매해 출간·배포하는 사상교육용 총서 《불멸의 력사》시리즈 중 김일성의 생애 마지막을 다룬 장편《영생》의 한 장면이다. 김정일 시대에 쓰인 이 책은 보다 더 노골적으로 수령의 신성성을 강조하

모리스 바르데슈 - 파시스트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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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스트적 삶 모리스 바르데슈 Maurice Bardeche - Fascist Life 파시스트 국가의 목적은 특정 모델에 따라 인간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파시스트 국가는 도덕을 가르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파시스트는 이용가능한 의지와 에너지가 민족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자본이라고 생각한다. 파시스트는 민족의 에너지를 형성하고 보존하는 집단적 자질을 장려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파시스트는 규율, 질서에 대한 선호, 노동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무감과 명예를 비롯한 민족적 기질을 개발하고자 한다. 이러한 민족적 도덕원칙의 일상 업무 상에서의 실천은, 책임의식, 연대감, 지휘책임에 대한 인식, 수용된 질서에 속하는 것에 대한 안락함 등의 중요한 과업으로 표현된다. 이런 감정은 학교 칠판에 쓰여진 문구에서는 배울 수 없다. 만약 교육이 아이들에게서 그것들을 일깨우려면, 체제 그 자체가 아이들을 인간으로 발전시키고자 해야 한다. 민족적 소득 분배의 정의에 기초하여, 적절하게 설정된 모범과 임무 등을 통해서 말이다. 규율은 마술봉을 휘두르는 행동 따위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거창한 호소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규율은 민족이 자기 지도자에게 보여주는 존경의 표시이다. 체제는 그러한 규율을 마땅하게 받을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같이 모든 행동을 진중하게 행하고, 국가에 대한 사랑을 성실하게 표현해야만 한다. 민족의 규율은 군대의 규율 처럼 제련된 무기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보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규율은 하나의 보상이다. 즉, 자신의 일에 전적으로 충실하며, 용기, 이타심, 정직의 본보기가 되는 모든 사람에 대한 보상이다. 이러한 민족적 의지의 응집은, 강조하건데 무결한 국가에서만 가능하다. 어떤 체제도, 체제의 권위보다 명예, 정칙, 도덕적 건강에 더 관심을 가져선 안된다. 무엇보다도, 이 점에 있어서 먼저 체제의 관료들이 완고함을 갖춰야만 한다. [즉, 민족사회주의 체제의 지도자들은 '내로남불'을 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