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부 - 우리의 국가관과 화랑정신

우리의 국가관과 화랑정신


김범부



"나 자신이 일찍이 여러 나라 국민의 국가관을 비교 연구해 본 일은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의 국가관에 관한 한 별도의 연구까지는 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윤관만은 대강 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가장 직접적으로 나 자신이 견지하는 국가관이 있고 우리 동포들이 국가에 대해 가지는 생각, 심정, 행동, 생활현실 등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한국 사람의 고유한 국가관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국가관이나 수입된 국가학에서 논의되는 이론 따위를 운위하는 일은 여기서는 삼가자는 취지에서 하는 말이다. 한국인이 역사적으로 고유하게 지녀온 국가관을 확인하고 적어도 그 장점만은 지켜나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


그러면 한국인의 고유한 국가관의 특징은 무엇인가? 최근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대강 짚어보면 마음에 와 닿는 무엇이 있다. 이를테면 5·16 군사혁명은 혁명동지들의 죽음을 각오한 국가관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4·19학생의거 역시 청년동지들의 목숨을 내건 국가관이 드러난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6·25때 적진으로 몸을 던져 싸우다가 지금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국가관은 무엇이었는가. 특히 개성전투에서 산화한 10용사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움직이고 있었을까. 일제 40년 동안 국내외에서 생사를 초월하여 투쟁한 항일의사들의 국가관은 무엇이었을까. 이처럼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몸을 던져 싸운 이들이 마음 속으로 간절히 원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 역사에서 이런 사례를 들자면 한이 없다. 아마 책 한권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질고 의로운 사람들의 심정과 행동과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 하나의 유형이 떠오른다. 그들이 지녔던 국가관의 한복판을 유유히 흐르는 하나의 공통된 맥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 맥의 참다운 면목을 어떻게 집약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지정(至情)이란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부귀를 탐내는 마음이란 없었고 공명을 얻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저 나라와 동포를 위해 신명을 다 바쳐 분투하고 정진했을 뿐이다. 그들의 심경을 자세히 관찰하면 크고 작은 이해타산이란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무조건의 충정(衷情)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지정인 것이다.


쉽게 말해 지정이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경애하는 심정과 같은 것이다. 물론 부모는 자식에게 무언가 기대를 하고 자식 또한 부모에게 덕을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 이것은 으레 있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일종의 변형으로 볼 수 있으며 핵심은 아니다. 부모자식 사이의 핵심적인 관계는 이해득실을 초월한 곳에 있다.


어질고 의로운 사람들이 나라에 대해 가지는 심정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해득실을 벗어나 있으며 무조건적이다. 그들의 마음은 지정에 닿아 있는 것이다. 굳이 그들의 국가관을 규정한다면 윤리적 국가관 또는 인륜적 국가관이라고 불러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어질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보이는 갸륵한 국가관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가? 이것은 실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면관계로 길게 설명할 여지는 없다. 그래서 결론만 넌지시 던져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화랑(花郞)의 혈맥에서 오는 것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회의보》 제2권 (1961.10 개제)에서 발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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