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20의 게시물 표시

웹사이트 《EVANGELION》을 개설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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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VANGELION》을 개설하며 ... 《 현재 국내외 정세는 아직도 질서 없는 혼란 속에 잠겨 있다 할 수 있으며, 이 혼란은 새로운 질서와 새 시대를 창조하기 위한 진통이 아닌가 한다. 이 혼란은 오로지 사상의 그것으로부터 된 것이다. 곧 근대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지상으로 하고 있음에 대하여, 공산주의는 이를 타도해서 그 개인을 계급으로 바꾸려는 데서 이해와 이해가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이 같은 이해, 곧 물질적 이해관계를 사회 존립의 기초로 삼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극단의 대립 속에서 심한 갈등과 마찰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십세기는 이 알륵과 싸움에 몹시 시달리고 있어서,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철학을 요망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세계사적 요망을 달성할 수 있는 자는 누구냐? 그것은 오직 신생 대한민국임을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삼팔선을 경계로 하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치열한 투쟁이 계속되는 사이에 우리는 이것을 직접으로 체험하고 있으며 여기에 필연적 귀결로서 새 세계의 이념이 우리로부터 생긴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새 역사의 싹인 것이며 새 세계의 길표인 것이다. 》 - 철기 이범석 1.  1987년을 전후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확산과 범세계적인 글로벌리즘의 국내 침략으로 민족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오늘 날의 현실에서, 민족 청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그 어느때보다 강하게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우리의 의지와 세계관을 표현할 온라인 상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도에서 이 블로그를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2. 이 블로그는 조선반도와 동,서양을 아우르는 전통주의자-민족주의자-파시스트들의 글을 발굴하고 번역하여 업로드하는 한편으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새로운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젊은 동지들의 글을 함께 게시하고 있습니다. 글의 소재는 정치,경제,역사,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 게시하여

민족 아나키스트의 맑스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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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national-anarchist.net/2014/01/a-critique-of-marxism.html?m=1 번역 : 버줌 편집 : 김갑식 맑스주의는 인간과 사회적 삶의 전체를 과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믿는 도그마(dogma)이다. 맑스주의는 모든 원인(cause)이 하나의 작용(operation)이 되고 모든 작용이 하나의 원인이 되는 절대적이고 기계적인 인과관계(absolute mechanical causality)를 상정한다. 밁스주의는 미래를 아는 척하고, 인간 발전의 조건을 제공하고자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맑스주의는 그저 과학의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그 누구도 과학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은 어느정도 주관적인 것이고, 단지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추정일 수 있다. 아마도 맑스주의의 가장 터무니없는 가정은 자본주의적 사실(capitalist facts)이 사회주의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가정일 것이다. 자본주의와 그것에 수반하는 불행이 그저 사회주의를 향한 여러 단계일 뿐이라는 생각은, 과학적 망상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비롯될 수 없고, 다만 부정의의 감정(a sense of injustice)과 단결의 욕망(a desire for togetherness)으로부터 자본주의에 대항함으로써만 성장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주의가 노동자 유물론의 산물이라는 맑스의 주장과 반대로, 인류는 매우 다른 이유로 사회주의로 다가선다. 사회주의는 수많은 작은 변화의 결실일 뿐이다. 어느정도 자본주의가 "성숙"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민중 역시 심각하게 퇴화되어 사회주의의 달성은 말 그대로 불가능해질것이다. 맑스주의는 불변하는 역사 발전을 근거로 미래를 확실히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의 의지와 행동이 이러한 미래를 막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맑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역사발전의 연쇄에 필수적인 연결고리로 간주한다. 그들은 자신을 사회 발전의

미국 민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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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민족의 역사 샤를 모라스   우연히 미국에서 역사 교사로 근무하는 한인 교포와 대화의 시간을 가진 적 있다. 그는 요즘 발간되는 미국 역사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있다고 말하면서, 미국인들이 동아시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고무되어 있었다. 덧붙이기를, <비 단 한국의 역사만이 아닌,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 이기도 하기에 미국인들에게 교육해야 한다 >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미국인의 시조는 누구인가? 콜롬버스? 메리플라워 호의 청교도들? 조지 워싱턴을 위시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의 국체를 건설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현대 미국인의 공통된 시조가 될 수 없다. 1790년 미국 최초의 이민법에 의거하자면, 오직 백인만이 미국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국은 그 시작조차 불분명한 빈약한 역사의 나라다. 이는 미국의 건국 자체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인위적인 실험의 결과이기 때문이며, 조상이라는 존재를 모르고 태어난 최초의 수정관 아기이다. 이 아이에게 아버지를 만들어주려는 시도들은 지금껏 여러 번 있어왔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미국인들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단일성을 거부함으로서 난제를 명쾌히 풀어냈다.   그렇다. 미국이라는 이 수정관 아기는 한 명의 정자로 창조된 게 아니다. 집단난교와 이종교배와도 같은, 아메리카 대륙을 더럽힌 수천 수백 가지 인종적 혼합의 결과물인 미국은 그들 모두의 시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요컨대 샤를마뉴와 아서왕, 카이사르와 공자, 단군의 자손들이 미국 시민권을 발부받는 즉시 그들 모두의 아버지를 자신의 것으로 물화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순수한 형태를 유지하던 신화적인 투쟁의 의식은, 미국인들에게 전승되는 과정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변증>을 거쳐 해체되고, 이윽고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만든 새로운 종족, <미국 민족>의 하부 역사

조선반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메시아니즘 - <이단 심판>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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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반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메시아니즘 - <이단 심판>의 정치학 샤를 모라스 《 김일성 주석은 미국의 건국과 운명을 대표했던 죠지 워싱톤, 토마스 제퍼슨, 아브라함 링컨 3대대통령을 다 합친것보다 더 위대하다. 김일성 주석은 세계의 건국자들과 태양신을 다 합친것보다 더 위대한 인간운명의 태양신이라는것을 나는 서슴없이 말하게 되는바이다. 》 (중략) 《예. 어버이수령님을 가리켜 현시대의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도 공감되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우리 수령님을 하늘이 낸 위인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세계의 지성인들이 수령님께서 창시하신 주체사상을 현시대의 성서라고들 말하고있습니다. 사실 주체사상을 성서에 대비하는것은 리치에 맞지 않지만 성서를 숭상하는 종교인들속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것은 주체사상이 만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있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미국의 3대 대통령이 아니라 희랍신화에서 나오는 아폴로나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모든 신들을 합친것보다 더 위대한분입니다. 그것은 <이민위천>의 세상을 현실로 안아오셨기때문입니다.》   김정일 동지께서는 흥분하실 때마다 그러하듯이 빠른 어조로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오늘 우리 민족은 수령님덕분에 가장 위대한 주체사상을 가지고 살고있습니다. 주체사상은 만민에게 주인된 운명을 주고 힘과 지혜를 주는 위대한 <복음>입니다. 주체사상은 만민공동의 소유물입니다. 이것을 가지면 세계의 주인이 되고 못가지면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메카를 찾던 사람들도 우리 나라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며 주체의 <복음>을 찾고있으며 6대주에는 <성바울>들이 별무리를 이루고있는것입니다.》 …   북조선 당국이 매해 출간·배포하는 사상교육용 총서 《불멸의 력사》시리즈 중 김일성의 생애 마지막을 다룬 장편《영생》의 한 장면이다. 김정일 시대에 쓰인 이 책은 보다 더 노골적으로 수령의 신성성을 강조하

모리스 바르데슈 - 파시스트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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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스트적 삶 모리스 바르데슈 Maurice Bardeche - Fascist Life 파시스트 국가의 목적은 특정 모델에 따라 인간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파시스트 국가는 도덕을 가르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파시스트는 이용가능한 의지와 에너지가 민족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자본이라고 생각한다. 파시스트는 민족의 에너지를 형성하고 보존하는 집단적 자질을 장려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파시스트는 규율, 질서에 대한 선호, 노동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무감과 명예를 비롯한 민족적 기질을 개발하고자 한다. 이러한 민족적 도덕원칙의 일상 업무 상에서의 실천은, 책임의식, 연대감, 지휘책임에 대한 인식, 수용된 질서에 속하는 것에 대한 안락함 등의 중요한 과업으로 표현된다. 이런 감정은 학교 칠판에 쓰여진 문구에서는 배울 수 없다. 만약 교육이 아이들에게서 그것들을 일깨우려면, 체제 그 자체가 아이들을 인간으로 발전시키고자 해야 한다. 민족적 소득 분배의 정의에 기초하여, 적절하게 설정된 모범과 임무 등을 통해서 말이다. 규율은 마술봉을 휘두르는 행동 따위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거창한 호소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규율은 민족이 자기 지도자에게 보여주는 존경의 표시이다. 체제는 그러한 규율을 마땅하게 받을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같이 모든 행동을 진중하게 행하고, 국가에 대한 사랑을 성실하게 표현해야만 한다. 민족의 규율은 군대의 규율 처럼 제련된 무기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보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규율은 하나의 보상이다. 즉, 자신의 일에 전적으로 충실하며, 용기, 이타심, 정직의 본보기가 되는 모든 사람에 대한 보상이다. 이러한 민족적 의지의 응집은, 강조하건데 무결한 국가에서만 가능하다. 어떤 체제도, 체제의 권위보다 명예, 정칙, 도덕적 건강에 더 관심을 가져선 안된다. 무엇보다도, 이 점에 있어서 먼저 체제의 관료들이 완고함을 갖춰야만 한다. [즉, 민족사회주의 체제의 지도자들은 '내로남불'을 해선

헝가리에서의 경험 - 헝가리 혁명 기념집회에 참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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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에서의 경험 - 헝가리 혁명 기념집회에 참가하다 Frontschwein 2019년, 가을. 나에게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생겨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동선을 짜는데, 예전부터 인터넷으로만 교류하던 헝가리인 친구(최소 내셔널리스트. 사실상 NS, 스트레잇엣지라 술담배 안함)도 만날 겸해서 그에게 방문계획을 말했다. 원래 나는 동부전선 진격하다 후퇴하는 독일군처럼 독일에서 출발, 폴란드를 거쳐 우크라이나를 찍고 다시 중부유럽으로 올 생각이었는데 10월 23일 헝가리 혁명기념일 집회 및 행진이 있다 해서 헝가리부터 들르게 되었다. 박물관에서는 리인액터들이 당시 사용된 장비들을 전시하고 방문객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필자도 기념사진 촬영 헝가리 혁명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각자의 관점마다 다르겠으나 일단 빨갱이들의 독재에 맞서 싸웠다는 것에 초점을 두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헝가리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건이다보니, 미디어에서는 극우라 불리는 내셔널리스트 단체의 행진과 집회도 계획되고 다른 유럽국가의 우파(?) 단체들에서도 대표들이 왔다. 혁명의 시발점이 된 라디오 방송국에서부터 행진을 시작했다. 당시 헝가리에는 북한에서 보낸 유학생들도 꽤 있었는데, 대학교 친구를 따라서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북괴는 이들이 헝가리의 수정주의 영향 받는 것을 원치 않아 긴급히 귀국시켰고, 일부는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여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도 만남을 가졌으며, 당시 남한에서도 혁명 소식을 듣고 헝가리에 의용병으로 가고 싶어하던 대학생들도 있었지만 냉전시대에 공산주의 국가로의 여행은 사실상 불가능했었기에 무산되었다. 아마 헝가리 혁명과 한국과의 관계는 이 정도로 요약이 가능할 것 같다. 내 친구는 한국에서 손님이 온다 하니 내가 행진에 참여하길 원했으나 시위 집행부에서는 의견이 반으로 갈렸다. 동양인도 참여시켜 자신들에게 칠해진 'racist' 주홍글씨를 지우고 전 세계가 자신들의 대의를 지지하며 모두가 연대한다는 것을 보일 기회라 생각하는 사람들

흑색전선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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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노트 이 글은 오토 슈트라서(Otto Strasser)가 '혁명적 민족사회주의 투쟁동맹(Fighting Community of Revolutionary National Socialists, Kampfgemeinschaft Revolutionärer Nationalsozialisten, KGRNS)'의 '흑색전선(Black Front, Schwarze Front)' 기획을 위해 1931년에 채택한 행동계획이다. 1931년 10월 2일, 오토 슈트라서의 추종자들이 '혁명적 민족사회주의 투쟁동맹(이하 KGRNS)'의 제2차 라이히 회의를 위해 오버프랑켄의 로엔슈타인 성에 모였다. KGRNS는 새로운 운동이었지만 당시에 이미 격동의 시기를 거친 뒤였다. 슈트라서는 1931년 3월에 일어났던 돌격대의 폭동(Stennes-putsch)에 손을 썼었고, 뒤이어 '자유군단(Freikorps)'의 지휘관 헤르만 에르하르트(Hermann Ehrhardt)와 꾸민 책략으로 인해 자기 조직 내부에 혼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그를 따르던 보다 급진적인 추종자들의 상당수가 피를 흘리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제2차 라이히 회의는 일종의 재결집이었고, 이념적 혼란을 틈타 KGRNS의 전술적 위치를 공식화하고, 장래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분명한 진로를 설정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회의의 결과 중 하나는 '흑색전선'의 개념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그것의 메니페스토를 발표한 것이었다. 흑색전선은 반자본주의, 반의회주의, 반공주의, 그리고 반히틀러주의 이상에서 정체성을 찾고 사명감을 공유하는 독일의 여러 '민족혁명 운동(national-revolutionary movements)'의 총조직으로서의 (물론 KGRNS가 주도하는) 정치적 연합이었다. 정치문화 평론지 <행동(Die Tat)>과 <저항(Widerstand)>의 대표들을 포함하여, '독일 민족사회주의 독립 전투운

벌쳐 자본주의는 유대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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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약 인간이 쳐부순다면 ,  그 가면 너머를 쳐부셔야한다 !”  아합 ,  모비딕 필자는 최근 터커 칼슨이  4 년전 필자가 소개한 바 있는 폴 싱어의 벌처 펀드 ,  엘리엇 어소시어츠에 대한 공격에 매우 흡족함을 느낀다 .  여러가지 의미로 이전에 엘리엇 같은 벌처 펀드들이 주요 언론의 관심을 벗어나 있었다는 것은 ,  그들이 얼마나 피해를 끼치고 착취적인가를 고려했을 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  여러 나라들이 엘리엇 어소시어츠와 같은 집단에 상당한 부채를 지고 있고 ,  터커의 코너에서 분명히 드러난 바와 같이 ,  그들의 마수는 미국 소도시의 중심에 뻗치기에 이르렀다 .  바이러스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일은 대단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착취적 금융가 무리들이 야기한 문제들은 결국 이들의 진면목을 파악하였을 때 비로소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지금까지는 그들의 행적을 논하는 데 쓰여진 수식어는 그들의 시체를 뒤지고 기생충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성격에 한해서 발전해왔다 .  따라서 엘리엇 어소시어츠는  “ 벌처 펀드 ” 가  “ 벌처 자본주의 ” 를 실천하는 전형적인 예시로서 설명되어왔다 .  그러나 이들 펀드들은 시체 파먹는 새들이 운용하는 것이 아니다 .  그들은 거의 노골적으로 유대인들에 의해 운영된다 .  이 글에서 필자는 규모가 크고 영향력 있는  “ 벌쳐 펀드 ” 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대표자 ,  정신 ,  금융 행태 ,  그리고 그들이 구린 돈을 어떻게 뿌리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미사여구들은 제쳐 두도록 하자 .  가면 뒤에 숨은 것을 치도록 하자 . 대머리 독수리의 정체 엘리엇 ,  서버루스 , FG  헤미스피어 ,  오토노미 캐피탈 ,  바우포스트 그룹 ,  캐년 캐피탈 어드바이저스 ,  마나크 얼터너티브 캐피탈 ,  골든트리 애셋 매니지먼트 ,  오렐리어스 캐피탈 매니지먼트 ,  오크트리 캐피탈 ,  펀더멘탈 어드바이저스 ,  그리고 틸든 파크 인베스트먼트 마스터 펀드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