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반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메시아니즘 - <이단 심판>의 정치학

 조선반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메시아니즘 - <이단 심판>의 정치학

샤를 모라스



김일성주석은 미국의 건국과 운명을 대표했던 죠지 워싱톤, 토마스 제퍼슨, 아브라함 링컨 3대대통령을 다 합친것보다 더 위대하다. 김일성주석은 세계의 건국자들과 태양신을 다 합친것보다 더 위대한 인간운명의 태양신이라는것을 나는 서슴없이 말하게 되는바이다.


(중략)


《예. 어버이수령님을 가리켜 현시대의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도 공감되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우리 수령님을 하늘이 낸 위인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세계의 지성인들이 수령님께서 창시하신 주체사상을 현시대의 성서라고들 말하고있습니다. 사실 주체사상을 성서에 대비하는것은 리치에 맞지 않지만 성서를 숭상하는 종교인들속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것은 주체사상이 만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있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미국의 3대 대통령이 아니라 희랍신화에서 나오는 아폴로나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모든 신들을 합친것보다 더 위대한분입니다. 그것은 <이민위천>의 세상을 현실로 안아오셨기때문입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흥분하실 때마다 그러하듯이 빠른 어조로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오늘 우리 민족은 수령님덕분에 가장 위대한 주체사상을 가지고 살고있습니다. 주체사상은 만민에게 주인된 운명을 주고 힘과 지혜를 주는 위대한 <복음>입니다. 주체사상은 만민공동의 소유물입니다. 이것을 가지면 세계의 주인이 되고 못가지면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메카를 찾던 사람들도 우리 나라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며 주체의 <복음>을 찾고있으며 6대주에는 <성바울>들이 별무리를 이루고있는것입니다.》



  북조선 당국이 매해 출간·배포하는 사상교육용 총서 《불멸의 력사》시리즈 중 김일성의 생애 마지막을 다룬 장편《영생》의 한 장면이다. 김정일 시대에 쓰인 이 책은 보다 더 노골적으로 수령의 신성성을 강조하는데, 그 과정에서 예수와 미국 건국자들, 희랍신화의 신들을 호명하며, 주체사상을 성서나 <복음>에 비유하기까지 한다. 주체사상의 핵심인 수령론이 설정하는 수령과 인민의 관계는, 소설의 비유처럼 신약시대 예수와 사도들의 관계, 탈애굽기 모세와 유대인들의 관계와 비슷하게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대오를 지도하는, 그의 밖에서는 구원이 존재할 수 없는 <생명의 길>이다. 한 줌밖에 남지 않은 남한의 <정통> 사회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른다면 개인숭배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북의 이러한 종교적 전유를 맑시즘적 유물론을 배신한 관념론적 오류라고 해석하고 이를 비판해야 마땅한 것이나, 사실 북조선 당국자들이야말로 맑시즘 내부의 메시아니즘적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엥겔스는《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서문에 《16세기 전에도 지금과 같이 체제전복을 꿈꾸는 위험한 당이 지금과 같이 로마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와 모든 국가의 토대를 잠식했다. 그들은 단호하게 황제의 뜻이 최고법이란 것을 부인했다. 그들은 조국이 없었으며, 국제적이었다. 그들은 갈리아에서 아시아까지 제국 전체에, 그리고 그 경계 넘어까지 뻗어 나갔다.》라고 서술한 바 있다. 그는 갓 태동한 공산주의 운동을 초기 기독교의 반체제적, 반항적 면모에 빗대어 말하며 <반동>들에게 무언가 경종을 울려주고 싶었던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공산주의가 근대주의라는 정자로 잉태된 기독교의 또 다른 사생아적 종파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공동분배와 공동생산을 강조한 원시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유래한 코뮤니즘의 이상은, 기독교 신앙의 무오류성을 굳게 믿는 신앙인들로부터 전승되어 마침내 맑스와 엥겔스로서 만개하였다. 루터와 칼뱅의 투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백과전서의 배포가 시작된 17세기~18세기는 바야흐로 자본주의 맹아의 완료와 함께 공산주의적 가치의 배양을 위한 준비의 기간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맑시즘의 역사관은 이를 철저히 반영한다. 인류의 모든 정치적 투쟁의 역사를 해체 및 재조립한 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예행이라고 단정, 인류의 최종적 <진보>에 대한 진리를 독점하고 있노라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가 제시한 이상적 인류의 모습, 즉 <오만한 진보주의자>는 계몽의 정점에 다다른 극한의 인본주의자와 다름 아니며, 인간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그 어떠한 도의적 관계도 거부하는 이성과 오성의 노예와도 다름이 없다.

 

  이 대재앙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이견의 여지는 있으나, 서구 근대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이들은 인류의 절망적 역사의 시작을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꼽고는 한다. 이 두 사건은 각각 산업과 철학을 대표하여, 거미줄 치듯 하부의 구성요소들을 생성해내 근대를 완성하였다. 본질적인 보편성을 내포한 근대는 그 간악한 손아귀로 세상을 쥐어 짜내기 위해 자신의 간악한 흉계를 <이성>과 <합리>라는 이름으로서 기만하여 세계인을 농락하였다. 기술과 산업, 과학의 발달은 곧 전통이 상실된 근대인들을 물질적 시뮬라시옹 속 생쥐로 만드는 대중 통제술의 발달이었으며, 종교적 가치로서 얽매인 삶에서 <해방>된 근대인들은 물신주의, 소비주의, 배금주의와 개인주의를 새로운 메시아의 위치에 올려 신앙하게 되었다. 근대의 진리를 불신하고 새 메시아를 거부하는 자들을 솎아내는 신종의 이단 심판은 현재까지도 형태를 복제하며 – 4.3이 있기 이전에 방데가 있었듯이 - 이어졌다. 피에 피를 거듭하며 바쳐온 제물은 최종적으로 포스트모더닉한 인간, 무균실에 태어나 어떠한 위험도 경험해보지 못한 실험 쥐를 소환해냈다. 폭력의 자궁을 깨고 나온 이 새로운 인종은, 자신을 지배하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과거에 대한 경멸만을 뇌까리다 종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파멸시켜버리게 된다. 이러한 노예 훈육의 과정으로도 충족되지 못하는 정신적인 공허는, 종교의 세속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종말적 해체를 통해 종교의 본연적 가치관을 거세시킨 후 유통하여 해결하였다. 막스 베버는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개신교회가 근대화와 세속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을 견인하는 주도적 역할을 맡고 있음을 논증해낸 바 있다. 그는 근면 성실하며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개신교 신자는 가장 훌륭한 노동자라면서, <돈이 새끼를 치면 칠수록 구원에 가까워진다>는 탈무드의 가르침을 기독교적인 가치로 둔갑시켰다. 노동의 형태적 본질을 그저 인욕을 충족하려는 충동의 결과로 격하시키면서 말이다. 카발라적 신비주의, 탈무드와 국부론을 성경에 필적할 만큼 숭상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은 서구 문명의 정수인 기독교를 완벽한 근대 종교로 개조해낸 것이다.


  세속화, 근대화의 기수인 프로테스탄티즘은 조선반도에서도 그 역할에 맞게 충실히 복무하였다. 아니, 더욱 가열차게 전진하며 조선 민족의 고통을 배로 가중시켰다고 해야 옳겠다. 조선반도는 근대의 폭력을 가장 강렬하게 경험했던 현장이다. 그렇기에 근대화에 대한 반감이 세계 여느 민족보다도 강력했으며, 민족적이며 주체적인 <대안적 근대>에 대한 열망도 뜨거웠다. 이러한 조선의 특수성은 구한말의 동도서기론이나 해방 직후의 우익 운동, 5.16 혁명 주체들의 이념적 실험과 같은 제3의 사상을 배양시킨 것이다. 대동아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반도의 새로운 주인이 된 미제는 조선인들의 저항의식을 제거하기 위해 유대-기독교적 독소를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동시에 민족주의 운동을 분쇄하여 지배적 위치를 사수해냈다. 미제의 밀가루와 옥수수로 견인되었던 남한의 산업화는 많은 전통을 <문명>의 이름으로 파괴하였고, 이로 인해 발생한 조선인들의 정신적 공허를 틈타 프로테스탄티즘은 우리의 영성에까지 침투하여 괴뢰화 한 것이다. <국가조찬기도회>는 영성적 근대화의 주체인 대통령을 새 메시아, 제사장의 위치에 올려놓고 추앙하는 메시아니즘의 전형이다. 과거의 전제봉건시대를 극복하여 민주주의 락원을 건설했다는 신형의 국조 설화는 빈약한 대한민국 국체론을 정당화하려는 리버럴들도 공명하는, 명백한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른바 <기독교 입국론>이 세운 나라 대한민국은 그러한 진리의 산물이며, 1948년 건국으로 형성된 국체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피력하는 기독교 우익의 주장은 일부분이나마 타당한 셈이다. 이윽고 48년 4월의 제주와 여수, 50년 6월의 반도 전역에서 이 새로운 국교와 새 신정국가 건설을 기념하는 <예리코식 축제>가 열렸다. 이단의 살과 피를 갈구하는 자들의 축제는 대를 이어 영광스러운 역사로 전승되고 있다.


  초점을 다시 북조선에 맞춰보자. 극한의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북조선은 진실로 남한의 기독교 우익과 대립적 관계인가? 남한의 기독교계가 북조선의 체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호명되는 단어는 다름 아닌 <악마>다. 맑스와 김일성을 사탄의 사도로 설명하지 않고는 자신들의 교리에 부합하는 해석을 내놓기 곤란하기도 하겠지만, 이단성을 탐지하는 즉시 이를 악마적 사유로 간주, 공격하려는 기독교적 본능의 발로이기도 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예수의 따스한 품으로 안기려는 다수의 탈북민들은, 지금껏 일생동안 안겨온 장군님의 품을 떠올리며 그와 유사한 감상으로 신앙에 열성적으로 임한다. 당 중앙과 교회는 인간과 메시아를 매개하는 역할로, 북조선의 지하 교회와 남한의 주체주의 지하 조직들은 서로에 대한 이단심판관으로서 기능하며 적대적 공생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반도 우에 존재하는 두 메시아는 근대주의라는 같은 아버지를 둔 근친 관계, <갈라진 형제>의 관계에 있다. 진리의 독점을 추구하며 보편화를 시도하는 이 두 형제의 닮은 얼굴은 수사적 표현의 차이를 제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상호 간의 공격이 거세어지면 거세질수록 끊임없이 서로를 모방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종국에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흡수되어버리는, 증오의 시뮬라르크를 구현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희극이다.

  

  자, 이제 이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에 종언을 고할 때가 왔다. 무솔리니의 말마따나 파시즘은 <모든 이단들의 바티칸>이다. 그들이 상상조차 못할, 그 어떤 진리의 경전에도 에언되지 않은 우리야말로 이 세상 제일가는 이단이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적, 적그리스도적 전유의 시대를 끝장낼 카테콘이 오고 있다. 악마, 사탄, 반동, 적폐, 그들이 그 어떤 언어로 우리를 표현해도 우리는 개의치 않는다. 위선적 사회의 단결을 위해 우리를 사냥한 이 시대의 이단심판관이, 그들의 진리를 분쇄하며 전진하는 우리의 대오를 보며 짓는 표정이 어떨지 상상해보라. 물질이라는 간악한 악마의 무화과로 보기 좋게 살찐 바리새이들을 조상의 제단 앞에 민족의 산제물로 바치자. 폭력과 기만으로 명줄을 이어온 너희 진리의 노예들은, 영원히 회귀하는 신화의 전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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