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에 대한 소고
영화《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에 대한 소고
218.147
“우리에게 부과되고 있는 것은, 일제를 타도하는 싸움을 개시하는 것이다. 법적으로나 시민 사회로부터도 허용되는 [싸움]이 아니라, 법과 시민사회에서 우러나오는 투쟁 = 비합법의 투쟁을 무장 투쟁으로서 실체화하는 것이다. 자신의 도피구 = 안전판을 남기지 않고, [신체를 걸고 몸소 반혁명에 뒷책임을 건다]는 것이다. 반 일제 무장투쟁의 공격적 전개야말로 일제 본국인의 유일하고 시급한 임무다.” – <복복시계> vol.1 中
1. 70년대 중반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일본 자국내의 연쇄 기업 폭파 테러를 감행한 좌익 무장단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본 영화를 보기 전 한국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체제영합적인 반일프로파간다 기류에 편승하는 수준의 내용으로 점철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가졌었지만, 다행히도 본 영화에서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속했던 투사들의 동기와 행적, 그리고 현재의 모습 등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 그렇기에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어느정도 만족스럽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2. 일제의 피지배 국가였음에도,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되었고 ‘반일 망국’을 외치며 급진적인 행동을 취한 이들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던 이 나라에 그들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킨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말미에 이들에 대한 평가나 의의를 ‘문제의식’에서 찾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본 영화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분명히 좌익적 이념을 기초로 살상도 불사하는 소수의 산발적인 테러공격을 통해 자국 내의 시스템을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급진적인 단체였다. 혹자가 지적했듯이 현대의 한국인들이라면 거의 대부분 디폴트로 탑재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체에 대한 집착 때문에 문제의식이라는 무해한 개념으로 승화시키고자 한 이유가 될 수 있겠으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으로는 인간의 생명, 그 이상에 위치하는 가치를 거부하려는 인간지상주의적 휴머니즘이 현대 세계의 근저에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3. 실제로 본 작품에서 테러를 감행했던 투사들의 후회 – 당시 무장행동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와 결국 그로 인해 피착취 계층인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 그리고 그들의 행동적 측면에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는 후대인들의 이야기를 잠깐이나마 다룸으로써, 이들이 지녔던 폭력성을 고의적으로 배제시켜 계승하도록 만드는 핵심 기제의 역할을 한다. 휴머니즘에 기반한 보편 타당한 명제에 기대어 도덕적 순결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반성과 자조를 요구한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내포하여 이를 바탕으로 흔히 이야기하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추구하자는, 한국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로 치환된다 (본 영화에 대한 주류 언론들의 논평을 보라). 이것이야말로 카진스키가 이야기한, 체제 분쇄의 혁명적 충동을 무해하고 온건한 길로 전환시키는 대중매체의 효과가 아닐까.
4.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순, 그리고 이를 타파하고자 하는 계급혁명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평범한 학생이었던 이들이 그것을 위해 테러라는 무모하고 극단적인 행동에 나서도록 만든 요인은 그런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의분감에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흔히 고고한 위치에서 역사의 운동, 세계의 역학관계를 관조하는 태도를 취하는 데 비범한 재능을 가진 좌익들은 이들과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는 자들을 ‘모험주의자’, ‘맹동주의자’라고 칭하는 듯하다.
분명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행위는 실제적 유효성을 지닐 확률이 희박했던 하나의 ‘모험’이었으며 그들은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된 기술이 중앙으로 집적되어 개개인의 모든 행위가 실시간으로 까발려지는 현 시대에서, 체제의 파괴를 이야기하는 것조차 그에 준하는 하나의 ‘모험’이 되어버린 현 시대에서, 제 3자의 위치에서 그들의 성패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아시아주의의 이상을 설파하면서도 결국 서구의 약탈적 제국주의로 전락했던 일본제국, 그리고 제국의 붕괴 후에도 그 잔해더미 위에서 영미의 자본 제국주의에 영합하여 책임 없는 번영을 누리는 당대의 사회에 즉각적인 행동으로 응수하는 것이야 말로 이들의 행동윤리였으며, 이들의 도의성이었다. 도의성은 그 어떤 외부요인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성을 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이념적 성격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을지언정 (예컨대, 그들이 설령 권력의 중심부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치더라도, 좌익적 이념을 기반을 한 그들이 아이누, 오키나와인을 비롯한 피지배민족의 문화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반동성’까지 포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 행동하는 자의 윤리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념의 정합성, 행동의 실효성, 구현 가능성에 관해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것은 결국 결과론적인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 글로벌 시스템의 붕괴, 그리고 그로부터 민족적 재귀 혁명을 꿈꾸는 자라면, 프랑코 조르지오 프레다가 말했듯이 “오늘날의 정치 체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복을 긍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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