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를 긍정하며

 정체성 정치를 긍정하며

카진스키


서구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는 분명 서구 근대 문명의 부패의 전조 쯤으로 여겨지며, 서구 문명을 수호한다는 소위 극우 세력 뿐 아니라 중도를 자처하는 현학자들도 혀를 내두르며 물고 뜯는 개껌 수준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보편타당한" 관점에서 봤을 때 고도 비만의 니그로이드 여성이 백색 미니사이즈 드레스를 입고 셀룰라이트 흘러내리는 둔부를 흔들어제끼는 광경을 백인 이성애자 가부장주의적 미적 편견을 깨는 혁명적 행위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확실히 광인 혹은 광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주류 사회의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인식에 동감하여 저들을 조롱하는 데 동참하기에 앞서 현상이 의미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문명의 병폐에 대한 말초신경적 반응은 절제되어야 할 것이다.


정체성 정치는 주류/다수 집단과 구별되는 특징을 구심점으로 결집된 비주류/소수 집단에 의한 권력 쟁취를 위한 활동이다. 이는 그 누구라도 기존 사회와 문화에 적응하여 집단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이념에 대한 거부이다. 동시에 자기 집단의 주권과 이익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집단의 구성원 만이 대변할 수 있다는 정치 철학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것은 주류 자유주의 사회의 묵인 하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정체성 정치 현상은 서구식 자유주의적 세계관의 자가당착이다. 백인 인텔리들이 국가의 정체성을 소비와 오락으로 치부했을 때 유색인종 모두가 그와 같은 발상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 만큼 오만한 일이 있을까? 자유주의자의 보편주의적 정치 호소문에서 볼티모어 니거는 백인을 향한 보복과 월마트 약탈을 읽는다는 것을 꿈에도 꾸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천진난만함에서 나온 것인가, 수동적 공격성의 발현인가?


그러나 지금까지의 정체성 정치는 유대인 금융 질서 하에서 "다수 압제자", 즉 정상인에 대한 멸시와 조롱, 탄압을 대신 수행하는 예니체리, 행동대원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다. "굿즈" 팔아먹으려고 재탕, 삼탕해 제작한 영화에 호모와 니그로들을 출연시키며 또 원작의 주인공을 이들이 대체하는 등의 변화(?)를 트위터의 파란 딱지(blue cheka), 바이스, 버즈피드, 복스 등 저명한 쓰레기 웹사이트에서 찬양하고 나서니 주류에 대한 반란은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 같지만 과연 거세된 예니체리의 실력 행사는 어디의 누구를 향하는가?  


그럼에도 정체성 정치를 긍정해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정체성에 대한 성찰, 정체성의 진정한 회복이야 말로 자본가들에 의한 작금의 추잡스러운 반인륜적 서커스를 몰아낼 유일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정체성 정치를 논리적 극한까지 끌고 갈 때 자유주의의 내부 모순은 극대화 될 것이며 정체성을 상실한 제1세계의 민족들이 다시금 근본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역겨운 투기꾼들이 당장 식별가능한 적대적 집단을 만들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자유주의 위선 극복은 역겨운 서구발 정체성 정치 타도와 맞물린 과제이며 각 인종이 자신의 뿌리를 다시 찾아갈 때 자유주의자들이 종언 선고를 내린 인간의 역사는 다시금 순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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