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에볼라 - 현대 음악과 재즈
현대 음악과 재즈
율리우스 에볼라
출처 : Julius Evola - Ride The Tiger
여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또다른 특정한 분야가 존재하는데, 시대의 일부 전형적인 과정들을 반영하며, 그것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야 말로 현재의 삶에서 일어나는 개괄적 현상들로 우리를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음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문명”에 부합하는 것과 달리, 명백히 현대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생성의 문명”의 음악은 우리가 이를 서구에서의 음악적 악령이라 칭할 수 있게 하는 기이한 방식으로 발전해온 것이 틀림없다. 모든 현대 예술의 근저에 놓여있는 분열의 과정들은 당연히 이 부분에 일조하므로, 음악의 최신 경향속에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일반적인 현상과 같은 자기해체의 상황을 발견한다.
절대 다수의 현대 서구 음악은 멜로드라마스럽고, 선율적이고, 가식적이고, 영웅적인 로만티시즘 (더욱 최근에는 바그너리즘으로 대표되는 선상에서)이건 비극적 파토스이건 (우린 오직 베토벤의 일반적인 개념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다) 간에 그것의 근원으로부터 그 어느때보다 뚜렷하게 나타나는 분리에 의해 특징되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도하게 단순화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분리는 단지 명백히 대치되는 두 가지 발전상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첫 번째는 화음에 관심을 기울인 채 지적인 요소들이 득세하며, 직관성과 감성 (“인간적인 주제”)을 해침으로써 주로 자기목적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추상적인 리듬-하모니 구성을 야기하는 기교 극단주의(technical radicalism)로 이끄는 지성화(intellectualization)다. 이것의 극단적인 케이스는 최근의 12음 음악과 엄격한 12음 기법(serialism)이다.
두 번째는 대부분의 최신 음악에서 볼 수 있는 형이하적(physical) 특징이다. 이 용법은 주관적인 파토스의 세계로부터 자기자신을 제거하는, 어떤 의미에서 바라보면 자연으로 회귀함과 동시에 사물, 행위, 그리고 근본적인 충동으로부터 주된 영감을 이끌어내는 경향이 있는, 대개 교향악적이고 서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음악에 이미 활용된 바 있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초기 인상주의와 플레네르[plen air, 옥외주의] 화풍의 발흥기에서 전통적인 실내 화풍을 중시하는 앵티미스트(intimist)를 향한 무관용과 흡사하다. 이러한 두 번째 음악적 경향은 아르튀르 오네게르(Honegger)의 태평양 231형(Pacific 231)과 모솔로프(Mossolov)의 제철소(The Iron Foundry)와 같은 것을 작곡의 극한으로 여기는 러시아 학파와 프랑스 인상주의자들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 이 두 번째 경향인 형이하적 조류가 초-지성화된 첫 번째 조류와 만나게 되었을 때, 이 조우는 최신 음악이 가지고 있는 대단히 흥미로운 상황을 정의하게 되었다. 순수하고 지나치게 정교한 리듬의 구성에서 나타나는 지성주의가 심리 작용, 혹은 열정적이고 로만틱하고 표현주의적인 세계보다는 자연적인 힘들의 기층(substratum)과 더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는 무언가의 환기(evocation)로 꽃피우게 된 초기의 스트라빈스키(Stravinsky)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봄의 제전을 이러한 무대의 결말로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부르주아 음악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대변하며, 음악은 순수한 리듬, 행위상의 울림과 음색의 활력을 나타내는 하나의 강렬함이 되었다. 이것은 “순수 음악”이나, 디오니소스적 원소를 덧댐으로써, 춤과 특정한 관련성을 가진다. 보컬과 감성적인 음악에 대한 춤의 우위성은 또한 이러한 조류를 특징짓는다.
여기까지 보면, 음악의 영역에서의 해체를 자유로이 만든 이와 같은 과정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긍정적인 양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오페라 음악, 독일의 음악, 그리고 또한 지극히 “휴머니즘적인” 가식으로 가득 찬 교향곡 음악들도 마찬가지로 틀에 박힘, 나른함, 그리고 위선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야기한 하나의 혁명으로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적어도 “진중한” 합주 음악의 분야에 있어서, 이 혁명적인 무대가 휩쓸고 간 이후 상술한 이 다음 단계는 기술적인 기교가 지배하는 추상적인 형태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 형태속에 담긴 내적 의미는 내가 실존적 거부 또는 오락(diversion)이라고 해석하는 것들을 상기시키며, 위험한 격동의 차원을 넘어버리고 만다.
여기서 댄스 음악이 때로는 패러디적이고, 때로는 신고전파의 영향을 받거나, 아니면 앞선 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소리의 무한한 공간화를 만들어내는 순수, 분열적인 울림의 계산(sonorous arithmetic)으로 특징되어지는 형식적인 음악으로 대체되어버린 스트라빈스키의 두 번째 시기에 관해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유로운 무조(atonal) 음악에서부터 발전을 꾀한 쇤베르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될 것인데, 주로 격분한 양상의 실존적 표현주의 (부르주아 관념론의 상징인 “보통 화음”(common chord)에 대한 무조의 반란으로 표현되어지는 존재의 반란)에 봉사하는 12음 기법(dodecaphony)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자기 발전은 현대 음악의 치명적인 위기를 나타내기에 상당히 중요하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반음계적 한계에 도달한 이후, 포스트-바그너 음악에서부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와 알렉산드르 스크랴빈(Alexander Scriabin)에 이르기까지 무조 음악은 과거 선행했던 모든 음악들이 가지고 있던 기준인 전통적인 음조 체계의 점진적인 폐기, 말하자면 소리를 하나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상태로 전이시키는데, 이는 마치 음악적 니힐리즘의 활성화와 같다. 그 이후, 위계적 구분이 사라지고 제한 없는 직접적 결합의 가능성을 얻은 반음계의 12음과 함께, 12음 체계는 통상적인 화음의 공식을 넘어선 새로운 추상 법칙을 부여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최근, 음악은 전자 기술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활용하는 실험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출 방식을 초월한 것이다. 이 새로운 영역은 또한 전자 음악에 적용시킬 추상 법칙을 찾는 데 있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12음 기법의 극한에 다다른 안톤 폰 베베른(Anton von Webern)의 작품에서 이러한 트렌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 아도르노(Adorno)가 현대 음악의 철학(Philosophy of Modern Music)에서 “12음 기법은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지 언정, 다른 이들은 당연하게도 음악적 “빙하기”라 불렀었다. 우리는 극단적인 희박 상태와 형식의 추상적 개념이 순수 대수적인 실체로 나타나는 현대 물리학의 세계 또는 그와 반대로 몇몇 초현실주의자들의 세계와 흡사한 세계들을 묘사하는 작품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한 음들은 전통적 구조들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작품에 내재된 순수 대수학은 오로지 뼈대와 원자단위로 해리된 음색만을 가진 무형으로의 완전한 해체만을 취하는 나선형의 체계로 나아가고 있다. 기계 테크놀로지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서와 같이, 기술적인 완벽함과 이러한 새로운 음악적 재료들의 힘은 동일한 공허함, 비천함, 환영, 혹은 혼돈에 의해 수반되어진다. 이 새로운 12음과 음렬주의 이후의 언어가 내적 황폐함을 토대로 초기의 음악이 가진 내용들과 유사한 것을 표현하리라곤 상상할 수조차 없다. 기껏해야 이러한 언어는 알반 베르크(Alban Berg) 작품의 외관과 같은 격분한 실존적 표현주의의 내용들을 조장하게 될 뿐이다. “노이즈의 구성”과 환경의 소리, 오케스트라의 음을 “몽타주”한, 소위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의 구상 음악(Musique concrète)은 이 한계를 넘어섰다. 대표적인 예로 존 케이지가 있는데, 그는 자신의 작곡이 더 이상 음악이 아니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한 음악가였다. 12음 음악을 통한 전통 구조의 해체를 넘어서고 베베른과 그의 학파를 뒤로 한 케이지는 순수한 소음, 전자 음향 이펙트, 장기간의 중단, 우연적 삽입, 심지어 라디오 송신과 같은 발화음을 음악에 혼합했다. 그 목표는 다다이즘과 마찬가지로 청취자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그리함으로써 우연의 지평선을 향해 내던지며 음악의 영역, 그리고 일반적으로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에 있다.
만약 우리가 댄스 음악의 지속적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클래식한” 교향곡 장르에서가 아니라 현대 댄스 음악, 특히 재즈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금의 시대가 “대중 출현의 시대”, “경제의 시대”, “전능한 기술의 시대”라 불리고 있는 것 이외에도, “재즈의 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훌륭한 근거가 있기에 그러하다. 이것은 의문스러운 작금의 트렌드의 연장선상이 비의적인 음악 모임의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의 당대 보편적인 청취 방식으로 스며들게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재즈는 순수 리듬적 혹은 당김음의 요소들과 관련하여 초기 스트라빈스키의 것과 동일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노래의 요소들 이외에도 이것은 혼(soul)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몸을 자극하고 휘젓는 “형이하학의” 음악이다. 이는 초기 유럽의 무도곡과는 상당히 다른데, 실제로 그러한 춤들에 스며들어 있는 바로 그 기품, 추동력, 움직임, 그리고 관능성은 – 예컨대 빈 혹은 영국의 왈츠, 그리고 탱고와 같이 – 재즈에서의 기계적이고 일관성이 없는 무언가로, 미개한 황홀경과 지속적인 반복의 활용을 통한 발작적인(paroxysmal) 것의 총체로서 존재하는 것들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내용물은 수백명의 짝들이 싱커페이션에 스스로를 내던져 몸을 흔들어대고 이러한 음악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분위기의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유럽과 미국의 거대한 대도시 댄스 홀에 서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 모든 이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현대 세계에서 재즈의 광대하고 동시다발적인 전파는 19세기 부르주아의 멜로드라마와 파토스를 대체했던 형이하적-지적인 “고전” 음악의 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의미들이 실제로는 철저히 젊은 세대들을 관통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허나 이 현상에는 두가지 측면들이 존재한다. 한 때 왈츠에 빠져버렸거나 멜로드라마의 기만적이고 인습적인 파토스를 탐닉했던 자들이, 이제는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내포한, 하나의 일탈적이고 피상적인 유행 이상의 것으로 간주해야 할 최신 재즈의 발작적인 기계성 또는 추상적인 리듬으로 둘러싸인 자신을 편안히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는 현재의 본질을 정의하는 이 복잡성의 통합적인 부분인, 청취 방식의 재빠르고 중점적인 변형을 마주하고 있다. 재즈는 명백히 현대 세계에서의 근원의 것을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는 하나의 양상이며, 부르주아의 시대를 불러내어 해체로 인도한다. 당연히 오늘날 재즈에 맞춰 춤추기 좋아하는 젊은 남성과 여성들은 단지 “재미로” 출 뿐이며 이러한 것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변화는 실재하며, 그것의 진정한 의미와 가능성은 오로지 전적으로 우리의 분석 속에서 차용한 특정한 관점에 의해 언급될 뿐이기 때문이다.
몇몇 이들은 재즈를 오늘날의 사람들이 자신의 현실적이고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인 존재와 마주했을 때 의지하고자 하는 보상심리의 유형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재즈는 필시 그들에게 날 것의 리듬과 단순한 활력의 내용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러한 개념에서 일말의 진리를 찾아보려 한다면, 우리는 서구인이 그러한 지점에 이르려고 고유한 형태를 창조하지 않았었으며, 예컨대 남동부 유럽 (루마니아인 혹은 헝가리인)의 리듬과 같이 리듬뿐만 아니라 진정한 역동성(dynamics)을 망라하여 구성된 매력과 강렬함을 소유한 유럽의 전통 음악의 요소들을 활용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유럽인은 그 대신 더 남쪽에 자리잡은 이국적인 종족, 열대지방과 아열대지방의 흑인과 물라토의 유산에게서 영감을 추구하고 있다.
아프리카-쿠바 음악 관련 학자인 페르난도 오르티즈(Fernando Ortiz)에 따르면, 현대 댄스의 초기 요소들은 실제로 모두 이러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원들은 라틴 아메리카를 통해 왔다는 사실에 의해 [관계가] 모호해진 기원들을 포함하고 있다. 현대인, 특히 북미인들은 심지어 엑스터시의 어두운 유형과 본디 연관을 가지고 있는 흑인 음악에서의 원시적인 특성을 가진 음악을 택하고, 동화되고, 전개하는 원시주의로 퇴행하고 있다.
실제로, 현대 댄스의 주요 리듬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 음악은 사람들에게 엑스터시와 포제션에 눈 뜨도록 활용하는 주요 기법 중 하나로 존재해왔다. 알폰즈 다우어(Alfons Dauer)와 오르티즈는 이러한 음악의 특징을 폴리리듬(polyrhythm)의 구조로 바라보았는데, 리듬을 나타내는 정적인 [정박자의] 악센트는 지속적으로 엑스터시의 [엇박자의] 악센트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이 특별한 리듬적 형태는 “끊임없는 엑스터시를 주입하는”것을 꾀하는 긴장상태를 만들어낸다. 소위 당김음으로 구성된 재즈 전반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당김음들은 에너지를 해방시키고 충동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는 지연(delay)과도 같으며, 이는 춤꾼의 자아를 탈취하고 “지배하는”(ride) 특정한 실체, 요루바 족의 오리샤(Orisha) 혹은 아이티 부두교의 로아(Loa)에 의해 춤꾼의 포제션을 유도하는 아프리카의 의식에서 사용되는 기법이다. 이러한 엑스터시적 잠재성은 재즈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부분에 있어서도 해체의 과정, 본디 소유하고 있던 요소들의 총체에서 분리된 리듬의 유형에서의 추상적 발전상의 과정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본래 환경의 세속화와 관례적인 틀의 비존재 혹은 그에 상응하는 의식적 전통, 적합한 분위기, 적절한 태도의 부재를 고려하면, 환기의 의식을 품은 참된 아프리카의 음악이 자아내는 특별한 인상을 기대할 수 없으며, 거기서 얻는 인상들은 언제나 미개하고 집단적인 스타일의 산만한 무형의 포제션으로 남아있게 된다.
이는 소위 비트 그룹이라 불리는 음악에서와 같은 최근의 유형들에게서 명백히 나타난다. 여기에서 강박적인 리듬의 반복이 만연하며 (아프리카의 톰톰(tom-tom)을 활용한 것과 유사하다), 신체의 발작적인 뒤틀림과 연주자의 불분명한 괴성을 야기하는 한편, 청취자 무리들은 이에 가담하여 히스테릭하게 비명을 지르고 한데 모여 날뛰며 야만적인 의례와 일부 데르비시(Dervish) 종파, 혹은 마쿰바와 흑인 종교의 부흥회와 유사한 집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음악의 연주자들과 도취된 젊은이들의 상습적인 약물 복용 또한 중요한데, 수많은 남녀들이 연루된 캘리포니아의 비트 혹은 히피 세션에서와 같은 진정한, 광란적인 “군중 멘탈리티”를 야기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싱커페이션으로 구성된 댄스 음악에게서 대중적인 대응물과, 현대 교향 음악이 도달했으나 유지될 수 없는 극단의 연장선상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보상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형태도 내용도 없는 난해한 현실도피의 반(半)-황홀경적이면서 히스테릭한 출발, 그 자체로 시작과 끝인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따라서, 몇몇 이들이 이것을 광란적이고, 집단적인 특정한 고대 의식들과 비교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한데, 후자의 것은 언제나 신성한(sacred)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극단적이고 일탈적인 형태들을 굳이 다루지 않더라도, 대중이 아닌 차별화된 인간이 해체의 시대로부터 실존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자양분이라 할 수 있는, 앞서 기술한 현저한 도취상태를 만족시키고자 사용할 수 있는 광포하고 엑스타틱한 가능성, 그리고 이를 제공하는 이 모든 수단들이 가진 일반적인 문제를 여전히 고찰할 수 있다. 근래의 과정들은 바로 이러한 극치들을 향하려는 경향을 드러내며, 현대의 젊은이들 중 일부는 그저 자신들의 정신을 무디게 만들고 극단적인 센세이션을 추구하고자 특정한 경험들을 활용하는 한편, 다른 이들은 그러한 상황들을 올바른 화답을 요하는 도전으로서 활용할 것이다: “존재”로부터 일어난 반동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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